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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Story

우리나라 오케스트라의 역사 3

by 정마에Zeongmae 2018.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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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교향악단의 창단 후 1년쯤 지나 동 악단의 총무였던 김생려를 비롯한 20여명의 단원이 고려교향악단을 그만두고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조기하게 되는데 이것이 서울관현악단이다. 그 후 고려교향악단이 제 26회 정기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체되자 그 단원들을 흡수하여 서울교향악단으로 재출발한다.
   이 서울교향악단은 40여명의 단원으로 시작했으며, 첫 지휘를 김생려가 맡아 인천문화회관에서 1947년 7월 30일~31일 제 1회 정기연주회를 열었다. 이 때 연주한 곡은 김성태의 ‘카프리치오’와 비제의 ‘카르멘 모음곡’이었다. 제2회 공연은 김준덕의 지휘로 베토벤의 〈교향곡 제8번〉등 베토벤의 작품 만으로 꾸몄다. 

▲ 지휘자 김생려


   서울교향악단은 KBS와 전속 계약을 맺고 방송국 스튜디오를 연습 공간으로 사용하며 13명 또는 18명 편성으로 방송에 출연했다. 제3회 공연부터 서울중앙방송국의 고문으로 와있던 미국인 롤프 자코비가 지휘를 맡으면서 연주력이 급격히 향상되었다. 자코비는 제14회 정기 연주회를 끝으로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한국 교향악계 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다.
   1949년 11월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임원식이 서울교향악단에 지휘자로 합류했다. 서울교향악단의 마지막 정기 공연은 1950년 5월 제23회 정기공연(지휘 김생려)이었고, 마지막 공연은 6월 16일~17일 임원식이 지휘한 임시 연주회로 ‘오페라 아리아의 밤’이었다. 6월 23일~25일 제24회 정기 연주회 ‘납량(納凉) 대음악회’를 계획하고 연습에 들어갔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여, 서울교향악단은 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9·28 서울수복 후 이 단원들이 주축이 되어 해군정훈음악대로 재출범한다.

▲ 지휘자 임원식


   해방 후 서울교향악단과 더불어 대한교향악단이 결성되어 활동을 했는데, 이 교향악단은 국민보도연맹(보련) 문화원 소속의 교향악단으로 1949년 6월 5일 결성되었다. 보련은 철저하게 반공을 이데올로기화하여 남로당, 민전 산하의 가맹자에 대한 대대적인 전향을 강요했다.
   이 대한교향악단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총 3회의 연주 활동을 하였다. 창단연주회는 김인수 지휘로 1950년 4월 11일~13일 시공관에서 있었는데, 피아니스트 홍지유의 협연으로 드보르작의 〈신세계〉교향곡,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롯시니의 〈윌리암 텔 서곡〉, 임동혁의 모음곡 〈조선민요〉 등 4곡을 연주했다.
   제2회 정기공연은 안병소 지휘와 백창규의 피아노 독주로 5월 25일~26일 시공관에서 열렸으며, 하이든, 슈베르트, 베버, 베토벤 등을 연주했다. 마지막 연주회는 시공관에서 6월 17일~19일에 열렸다. 특기할 점으로는 지휘 정종길, 베이스 독창에는 신막이 참여했다는 것인데 대한교향악단은 해방 공간에 조선음악가동맹의 동맹원인 신막, 정종길을 출연시킴으로써 좌익 세력에 대해 다분히 전시적이고 공세적인 성격을 보여주었다.

   6·25 전쟁 발발로 서울교향악단의 제24회 정기연주회가 중단되고 음악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9·28 서울수복 후 해군 당국의 주선으로 해군문화선무대소속 음악가 120여 명 전원이 해군 문관으로 임명을 받고 해군정훈음악대가 구성되었다. 이 악대는 합창 60명, 오케스트라 50명에 스탭진을 합하여 120명 정도로 구성되었으며 단장 겸 지휘는 김생려가 맡았다.
   첫 연주는 1950년 11월 11일 해군창설 5주년 기념으로 시공관에서 있었다. 이때 참여한 음악인으로는 박민종, 이봉수, 원경수, 이남수, 홍연택, 김천애, 이인범, 오현명 등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어디까지나 군악대였기 때문에 유엔군 위문 공연, 외국 귀빈 환영 연주를 하였지만,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교향악 운동의 불씨를 살려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휴전 후 1953년 9월 부산에서 서울로 보금자리를 옮긴 해군정훈음악대는 미국에서 젊고 유능한 음악가 5명을 초청해 3개월간 이들의 협주곡 연주와 단원에 대한 기술지도 등으로 집중적인 훈련을 받았다. 1956년 3월 28일 시공관에서 열린 정기연주회 때부터 ‘해군교향악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교향악단협회가 사단법인체로 발족되어 군과 민간의 협조체제가 만들어졌다. 연주 기량도 크게 향상되어 1957년에는 해군 LST 함정을 타고 동남아 예술사절단으로 싱가포르, 홍콩, 대만을 순회공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순회공연을 마지막으로 해군교향악단은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재발족한다. 1957년 8월 1일 서울특별시가 시립교향악단 설치 조례에 의거해 해군교향악단을 흡수해 1957년 11월 서울교향악단이 만들어졌고, 1960년에는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개편되었다. ‘민족의 교향악단’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같은 해 9월 13일 초대 단장 겸 지휘자 김생려의 지휘로 창단 연주회를 열었다.
   김생려가 창단 이듬해인 1961년 사직하고, 미국에서 귀국한 김만복이 상임 지휘를 맡게 된다. 1975년 1월에는 4관 편성의 규모를 갖추어 브루크너, 말러, 쇼스타코비치 등 대규모 레퍼토리를 소화해 낼 수 있게 되었다. 1977년 5월에는 동남아 순회공연을 다녀왔으며 1978년 7월에는 서울시향의 단체 운영권이 서울시 문화공보관실에서 세종문화회관으로 이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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