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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기업 행사에서 오케스트라가 할 수 있는 일 연주를 넘어, 조직의 메시지와 경험을 설계하는 음악기업 행사에 오케스트라가 나온다고 하면 대부분 비슷한 장면을 떠올린다. 행사 시작 전 로비에서 연주하는 현악 앙상블, 시상식의 팡파르, 만찬장에 흐르는 클래식 음악 같은 것들이다. 이때 참석자 대부분은 음악을 듣기보다 명찰을 찾고, 자리 배치표를 확인하고, 반가운 얼굴과 피하고 싶은 얼굴을 구분하느라 바쁘다. 그동안 음악은 조용히 ‘고급스러운 공기’ 역할을 한다.물론 그것도 오케스트라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오케스트라를 행사를 고급스럽게 꾸미는 배경음악으로만 쓴다면, 최고급 오븐을 사서 빵 데우는 데만 쓰는 것과 비슷하다. 쓸 수 있는 가능성의 상당 부분을 놓치게 된다.오케스트라는 서로 다른 악기들이 모여 하나의 음악을 완성하는 조직이다. 악기마다..
가을이 봄을 닮은 날, 멘델스존을 다시 쓰다 - October Piano Letter 10월의 피아노 편지 한 통을 부쳤습니다.창밖에는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는데,피아노 위에는 봄에 쓰다 만 편지 같은 멜로디가 놓여있더라고요.이번에 작업한 곡은 October Piano Letter 입니다.멘델스존의 에서 영감을 받아,제가 Maestro Nova라는 이름으로 재해석한 첫 번째 가을 피아노곡이에요.원래 이 곡의 제목은 '봄의 노래'인데,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가을의 노래'로 더 많이 불린대요.그 이유를 연주해보니 알겠더라고요. 너무 밝지도, 너무 슬프지도 않은 그 온도.딱 10월 오후 4시 햇살 같은 온도였어요.이 곡을 이렇게 들어보세요.피아노 연주 영상을 넣지 않고, 일부러 아무도 없는 가을 풍경 영상을 배경으로 깔았어요.따뜻한 아르페지오가 물결치듯 흐를 때, 화면에는 은행잎이 떨어진 숲..
숙박과 공연을 결합하면 무엇이 달라질까 공연이 끝나면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대부분은 주차장으로 간다. 그리고 출차를 기다리는 줄에서 앙코르의 여운을 조금씩 잃는다. 멀리서 온 관객은 사정이 더 급하다. 커튼콜 박수를 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막차 시간을 계산한다. 브라보를 외치는 입과 시계를 보는 눈이 따로 움직이는 셈이다. 공연은 끝났고, 관객의 경험도 사실상 거기서 끝난다.그런데 공연이 끝난 뒤 돌아갈 필요가 없다면 어떨까. 공연장에서 몇 걸음 떨어진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에는 숲길을 걷고, 그 지역 음식을 맛보고,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면 말이다.이때 공연은 더 이상 한두 시간짜리 관람 상품에 머물지 않는다. 여행의 목적이 되고, 머물 이유가 되고, 지역을 경험하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숙박과 공연..
연결은 살아 있음의 증거다 영종도 바닷가에 서서 육지로 이어진 다리를 바라본다.바다는 넓고, 다리는 길다. 물과 땅 사이에 놓인 다리 위로 자동차들이 쉼 없이 오가고, 그 위 하늘에서는 비행기들이 꼬리를 물고 내려온다. 한 대가 활주로를 향해 고도를 낮추면 기다렸다는 듯 다음 한 대가 뒤를 잇는다. 맛집 앞에 줄 선 손님들처럼 질서 정연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쪽은 번호표 대신 관제탑의 호출을 기다린다는 것 정도다.그 끊임없는 움직임을 보다가 문득 '연결'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바다는 땅과 땅을 갈라놓지만, 동시에 두 땅을 이어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다리는 그 사이를 건너게 하고, 비행기는 더 먼 곳의 사람과 도시를 잇는다. 우리가 단절이라 여겼던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연결의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단절과 연결. 그 사이에서 나는 ..
자연 속에서 듣는 음악은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음악을 듣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다. 정해진 시간에 객석에 앉아 조명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고, 무대 위 연주자에게 시선을 모은다. 공연장은 음악을 듣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정교하게 설계한 공간이다.그런데 같은 곡이라도 숲속의 작은 연주회나 호숫가의 무대, 바람이 스치는 정원에서 들으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음악이 달라진 것일까, 아니면 음악을 듣는 우리가 달라진 것일까.오랫동안 지휘자로 일해 온 내게 이 질문은 공연 장소를 바꾸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음악과 공간,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음악을 경험하는 방식 전체에 관한 질문이다.1. 자연은 음악의 배경이 아니다공연장은 음악과 주변을 분리하도록 지어진다. 외부 소음을 막고, 벽과 천장의 재료와 각도로 잔향을 조절하며, 모든 객석에 소리가 고르게..
꽃밭은 계획 없이 만날 때 더 아름답다 연휴가 지나고 날이 참 청명하다.하늘은 맑고 햇살은 따뜻하다. 이런 날이면 엉덩이가 먼저 들썩인다. 그런데 나의 짝은 반대다. 연휴 내내 근무를 했으니 오늘만큼은 소파와 한 몸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 선언문에는 꽤 단호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점심만 먹고 조금 다녀오자.”짝의 눈빛이 보험 약관을 읽는 사람처럼 가늘어졌다. 무리도 아니다. 우리 집에서 '점심만 먹고’는 일기예보보다 신뢰도가 낮은 문장이다. 그 말로 시작해서 해 질 무렵에야 돌아온 날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짝 입장에서 이 문장은 '오늘 하루 통째로 주세요’의 순화된 표현일 것이다.그래도 오늘은 협상이 타결되었다. 아마 피곤해서 반박할 기운조차 없었던 것 같다. 이겼다기보다는 상대가 기권한 셈이다..
음악을 관광상품으로 만들 수 있을까 처음 들으면 조금 어색한 질문이다. 음악을 상품이라고 부르면 음악가가 눈살을 찌푸리고, 관광을 예술이라고 부르면 여행사가 고개를 갸웃한다. 음악은 예술이고, 관광은 이동과 소비를 전제로 하는 산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사람들은 여행지에서 무언가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에게 "거기서 뭐 봤어?"라고 물으면 대답은 대개 "거기서 먹은 게 말이야"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먹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어떤 장면 속에 있었는지를 기억한다.그렇다면 음악도 여행의 기억이 될 수 있지 않을까.공연을 관광상품으로 만드는 것과 음악을 관광상품으로 만드는 것은 다르다유명 연주자를 초청해 공연을 하나 열고 관광상..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음악과 차 한 잔 연휴의 마지막 날입니다.내일부터 시작될 일상이 벌써 문밖에서 조용히 노크하고 있지만, 오늘만큼은 못 들은 척하기로 합니다. 괜히 서둘러 무언가를 시작하기보다는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천천히 하루를 열어 봅니다.오늘 고른 차는 흑전차입니다. 잔에 따르자 은은하면서도 깊은 향이 올라옵니다. 그 향을 한 모금 머금고, 내년 무대에 오를 창작 오페라의 대본을 펼칩니다.오페라 대본을 읽는 일은 조금 특별합니다. 이야기만 따라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인물이 왜 하필 이 말을 하는지, 이 장면에서 감정이 어디까지 차오르는지, 대사가 멈춘 자리의 침묵이 무엇을 말하는지까지 들여다봐야 합니다. 오페라에서는 쉼표도 대사입니다.지휘자는 작곡이 끝난 뒤에야 음악과 처음 인사를 나누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작곡이 완성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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