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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지식과 지혜를 찾아서/번역 작업

칼뱅주의의 국제관 1

by 정마에Zeongmae 2023.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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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칸디나비아를 제외하고 루터교는 독일 영토, 슬라브 국가의 독일어를 사용하는 소수 민족, 제국의 도시들과 교역하는 외국 상인들에 국한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개혁 개신교 공동체는 16세기 후반 유럽 전역에 걸쳐 트란실바니아에서 스코틀랜드의 서부 섬에 걸쳐 흩어져 있었다. 이탈리아, 이베리아 반도, 그리고 북유럽 국가들만이 수용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개혁 개신교 교회는 여러 문화권에서 번성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다른 신앙적 고백들과 함께 공존했을 뿐만 아니라, 두드러진 고백적 연대감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온건한 영국 청교도인 윌리엄 브래드쇼는 '그 교회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믿음의 가정이다.' ‘개척자들 … 그들은 모두 천국의 시민들이고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을 이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거절했다.

▲ 젊은 시절의 장 칼뱅(Jean Calvin, 1509 ~ 1564)


    사실, 그들과 적대적이었던 가톨릭과 루터교는 때때로 개혁 신학자들과 정치인들이 탐닉하는 호전적인 형제 수사학에 대해 불필요한 경각심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칼뱅주의 국제주의자라는 개념을 가톨릭적 상상력의 가공물로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의 수집품들과 금식하는 날들을 통해 개혁파 공동체들은 프랑스와 팔츠 지역에서 그들의 '고뇌에 찬' 동지들에게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도움을 주는 습관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유럽의 무대였던 종말론적 드라마의 참가자가 되었다.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가나안의 언어'에서, 그들은 '세계의 사역자'들과 영적 전쟁을 벌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관여하고 있었다.

    상당한 정도로 칼뱅은 그 자신이 이 세계주의적인 성격의 설계자였다.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그의 경건함과 '복음의 공동 방어'에 대한 평생의 헌신은 이 프랑스 태생의 개혁가가 오랫동안 제네바의 교회 문제에만 전념하는 것을 막았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그의 견해에 따르면 ‘유일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 전체가 지구 위에 퍼져 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교회는 '개별 교회로써 인간의 필요에 따라 마을에 배치되어 각각 교회의 이름과 권위를 올바르게 가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칼뱅은 그러한 '개별 교회'가 '의식에 있어서 완벽한 순응'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으며, '사소한 논쟁 때문에 교회를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1553년 클레베스의 베셀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개혁파 신도들은 루터교의 성체 의식을 따르고 촛불과 호스트를 사용하도록 강요받았다. 양심에 찔린 이방인들은 제네바 각료들의 조언을 구했지만, '우리의 과도한 심각성이나 소심함으로 인해 교회의 단합이 방해받지 않도록 우리의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모든 의식에' 순응하라는 직설적인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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