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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가 <교향곡 D 장조> 아리아가(Juan Crisóstomo Arriaga, 1806~1826)는 조숙한 천재적 소질로 인해 '스페인의 모차르트'라고 불리기도 한 작곡가입니다. 하지만 만20세가 못 되어 세상을 떠난 그의 작품은 몇 개밖에 남아있지 않죠. 그는 1806년 1월 27일 스페인 북부 빌바오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음악가였습니다.아리아가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보다 체계적인 음악수업을 위해 15 세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파리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1821 년 9 월 26 일 빌바오를 떠났고 같은 해 11 월에 École Royal de Musique et Déclamation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824년에 겨우 18살의 나이 파리음악원의 조교수..
생각을 바꾸면 보이는 것 2 2001년 개봉한 영화
슈만의 혁명성-작곡가들의 사회상황에 대한 음악적 대응에서 우리는 또 배워야 슈만은 1834년에 새로운 음악잡지, 를 창간했다. 그 때 그는 성미가 급한 24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아마도 그의 일생 동안 작곡가보다는 비평가로 더 잘 알려졌었으며, 대중적인 음악적 토론을 이끌어 낸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음악적 혁신에 대한 슈만의 열정적 논의와 베를린, 파리, 비엔나 등지에서 원고료를 받고 보내는 보도 자료들로 인해 는 독일 전역과 유럽의 다른 다라들에서도 구독되었다. 진보적인 싸움을 하기 위해 슈만은 글을 쓸 때 가공의 인물들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다비드동맹Davidschündler'과 그에 반대하는 ’필리스틴Philistines'이다. 슈만은 피아노 곡 의 마지막 행진곡 과 에서 이를 표현했다. 슈만의 말을 빌리면 다비드동맹은 괴테의 자서전을 연상시키며 ‘잡지에 끼어있는..
생각을 바꾸면 보이는 것 1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 상황과 형편에 따라 달리 본다. -아나이스 닌 남미의 국경지대에 한 세관원이 고민에 빠졌는데, 매일 오토바이를 타고 국경을 통과하는 할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오토바이 뒤에 항상 주머니를 달고 다녀, 세관원은 밀수꾼이 아닌가 수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몇 번이고 검문했지만,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은 금속탐지기를 동원하여 검색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자 할아버지에게 하소연하듯 물었습니다. "영감님, 절대로 체포하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밀수하는 게 있지요? 그게 대체 뭡니까?" 그러자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오토바이라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은 정작 봐야 할 것을 못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매직아이처럼 말이에요. ..
올바르게 필라델피아에 가난한 어린 소년이 있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다녔다. 소년은 13세 때부터 벽돌공장에서 일하였다. 그런데 어린 소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매주 일요일 교회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비가 조금만 내려도 진창길이 되어 다니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어느 주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발목까지 파묻히는 진흙길을 거닐면서 소년은 생각했다. '만약 자기들 집 같으면 벌써 훌륭하게 벽돌이나 돌로 포장하였을 것이라고...' 소년의 눈에는 벽돌로 포장된 길과 그리로 들어가는 자기 또래의 많은 아이와 어른들이 눈에 아른 거렸다. 소년은 야심 찬 결심을 했다. "한번 내 손으로 잘 다듬어진 길을 만들어 보겠노라고." 그리곤 소년은 월급 ..
화성의 영감(L'Estro Armonico)과 창조 , 창의 비발디는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작곡가이며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그는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사원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 지오반니 바티스타에게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웠습니다. 1703년에 성직에 들어갔으나 몸이 약했기 때문에 미사 집전을 면제받았으며 머리카락이 붉었기 때문에 “붉은 머리 신부”라 불렸습니다. 비발디는 작곡과 오르간을 레그렌찌에게 배웠고, 한편으로는 알비노니, 마르첼로의 영향을 받아 약40곡의 오페라를 남기고 있으나 오늘날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다작가로서 오페라, 교회음악, 기악곡 등 그 종류에 있어서도 광범위하며, 특히 협주곡은 그의 작품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의 협주곡과 기악곡의 대부분은 아직 수고(手稿)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 중 80곡의 협주곡은 드..
마이어베어: 대관식 행진곡 자코모 마이어베어(Giacomo Meverbeer, 1791~1864)는 베를린 출생의 작곡가로 본명은 야콥 리프만 베어(Jakob Liebmann Beer)이다. 유태계 은행가의 아들로 베를린 근교의 포겔스도르프(Vogelsdorf)에서 태어나 클레멘티에게 피아노를 배웠는데, 신동이라고 일컬어졌다. 1810년부터 다름슈타트에서 포글러로부터 작곡을 배우고(칼 마리아 폰 베버와는 같은 제자) 1814년 빈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데뷔하였는데, 거기에서 알게 된 살리에리의 권유로 이탈리아에 건너가 오페라를 공부하고 로시니 스타일의 작품으로 일단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로 가서 오페라 공부를 하면서 이름도 자코모로 바꾸었다. 유대인인 그는 평생 유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1826년 파리에서 자기 작품들을 상..
하이든 처럼~ "사람이 인하지 않으면 예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사람이 인하지 않으면 음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공자 1993년에 발견되어 1998년 공식 발표된 《곽점초간》이라는 중국의 옛 문헌에 따르면, 인이라는 글자는 몸 '신' 밑에 마음 '심'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몸으로 절실히 느끼는 마음'이라고 하지요.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그것도 절실히 느끼는 상태가 인이라는 것입니다. 굳이 해석하자면, 인은 이성적인 인식을 뛰어넘는 감성적 지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머리만 발달한 것이 아니라 감성도 매우 풍부한 사람, 그래서 남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이 인자가 아닐까요? 저는 겉으로 드러나는 예악의 형식보다 내면의 진실성을 중요하게 다루는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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