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바흐 연구가나 음악사 학자들은 바흐의 생애를 3기로 나누고 있습니다. 1708년부터 9년간의 바이마르 궁정 오르가니스트 시대(주로 칸타타와 오르간 곡의 작곡에 전념)를 제1기로, 제2기는 1717년부터 1723년까지 괴텐 궁정의 악장시대(기악곡, 합주곡, 실내악곡 등을 작곡), 마지막으로 제3기는 라이프찌히 성 토마스 교회 부속 토마스 학교의 칸토르(음악감독) 시대로 구분합니다.
라이프찌히 시대의 바흐는 매우 바쁘고 고된 나날을 보냈습니다. 학교장, 사회장, 법원장으로서 사회 참여는 물론 교육과 4개 교회의 연주의 감독도 혼자서 해냈습니다. 이로인해 얻어지는 연수입 7백탈러와 임시수입으로 많은 자녀들을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었으며, 가정생활은 행복했습니다.
이렇듯 복잡한 속에서도 바흐는 "요한수난곡", "마태수난곡", "b단조 미사"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바흐는 이 무렵 전 독일에서 오르가니스트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이로 인해 1747년 5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의 초청으로 포츠담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궁정에서는 노대가를 맞아 연주회가 열렸는데, 프리드리히 대제는 "제군들, 마에스트로 바흐가 왔도다."라고 소리치며 이례적으로 문앞에까지 달려가 그를 환영했으며, 귀족들은 열광적으로 바흐를 맞이했습니다.
이날 밤 연주회를 마친 바흐는 왕의 주제를 받아 《음악의 헌정》(BWV1079)을 작곡하여 프로이센 왕 프드리히 2세에게 선물로 보내 헌정했습니다.
1748년부터 바흐는 점점 시력을 잃어 실명하게 됩니다. 암흑에 쌓여있었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고 1748부터 1749년에 걸쳐 이전에 작센 선제후에게 헌정했던 "키리에"와 "글로리아"를 발전시켜 《b단조 미사》를 완성합니다. 이 장대한 작품은 바흐의 성악곡 창작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1750년 3월 영국의 안과의사 존 테이러의 집도로 수술을 했지만, 이것은 바흐의 체력을 소모시켰을 뿐 아무런 효과도 없었습니다. 죽기 열흘 전날 아침, 이상하게도 그의 눈은 광명을 분별하여 회복될 듯 보였지만 1750년 7월 28일 65세를 일기로 음악계의 거목인 바흐는 라이프찌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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