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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Story/BACH

서양 음악의 아버지, 바흐 II

by 정마에Zeongmae 2020.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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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른슈타트에서의 바흐는 그야말로 다감한 청춘을 보낸 것 같습니다. 악평이 나있는 성가대원 가이어스바흐와의 격투나, 여인의 출입을 금하는 교회 성가대석에 낯선 여인을 입장시킨 것 등 화제가 적지 않았습니다. 1705년 말 바흐는 뤼벡에서 오르간의 대가인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1637 ~ 1707)가 연주회를 연다는 이야기를 듣고 1개월의 휴가를 얻어 도보로 80Km를 걸어 배우기도 하고 연주회를 감상했다고 합니다.

 

▲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1637 ~ 1707)

 

   꿈과 같은 뤼벡에서의 4개월은 바흐에게 있어서 커다란 수확이었으나 휴가를 3개월이나 넘긴 그는 직무태만으로 교회에서 질책을 당해야 했습니다. 또한 합창 반주를 아무렇게나 했다고 비난을 받은 바도 있었습니다. 북스테후데의 호방한 작풍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는 유명한 《토카타와 푸가 D 단조, BWV 565》가 있습니다. 바로 위의 형인 요한 야코프를 위하여 작곡한 《카프리치오 "사랑하는 형과의 작별에 즈음하여", BWV 992》도 아른슈타트에서 만들어졌으리라 여겨집니다.

 

   몇몇의 교회와의 불화로 기분이 상했던 바흐는 1707년 6월 뮐하우젠의 성블라지우스 교회로 옮겨 갔습니다. 그해 10월 아른슈타트로 돌아와 17일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 시기를 전후로 최초의 매우 중요한 칸타타가 작곡되었습니다.

   1706년 6월 다시 바이마르의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옮겨 그곳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켜게 되었고, 그로부터 9년 동안 머물게 된 그는 이탈리아의 대가인 비발디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훌륭한 오르간 곡을 만들었습니다. 이 9년 동안의 작곡과 수련은 훗날 그의 명예와 성공의 기초를 만들어 주기에 충분한 것이 되었습니다.

   1714년에는 콘서트 마스터가 되었으며 악기의 이론과 이탈리아 음악의 연구를 위해 여러 차례 여행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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