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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Story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 #1

by 정마에Zeongmae 2023.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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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대혁명에서 파리 코민에 이르는 80여 년의 정치적 격변 이후 벨 에 포크(아름다운 시절)에 활동했던 아방가르드 작곡가로, 1866년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지방 옹플뢰르에서 해운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반항적이었고 농담을 즐겼습니다. 1879년 파리음악원에 입학했으나 아카데믹한 분위기에 염증을 느껴 중퇴했어요. 26세의 청년 사티는 쉬잔 발 라동과 6개월간 짧은 사랑을 나누기도 했죠.


    1887년 몽마르트르에 정착하고 나서는 개성적 차림새를 하고 알퐁스 도데, 기 드 모파상, 에밀 졸라, 샤를 구노, 클로드 드뷔시 등 파리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카페 '검은 고양이Le chat noir'의 피아니스트로 일하며 이름 을 날렸습니다.

    똑같은 모양의 검은 벨벳 슈트 열두 벌을 돌려 입고, 백여 개의 우산을 갖고 있었지만 정작 비가 오는 날에는 젖는다는 이유로 접고 다녔으며, 1인 종교의 사제이자 유일한 신자로 산 기인이었습니다.

    사티는 시대를 앞선 '음악 발명가'였습니다. '안단테' '모데라토' '알레그로' 등을 적어야 할 악보의 지시어 자리에 "치통을 앓는 나이팅게일처럼" 너무 많이 먹지 말 것" "난 담배가 없네" "매우 기름지게" "혀끝으로" "구멍을 파듯이' ......라고 썼어요. 같은 악구를 무려 840번 반복하는 곡 <짜증les Vexations>을 완성하고 나서는 "이 곡을 제대로 연주하려면 아주 조용한 곳에 꼼짝 말고 앉아서 미리 단단히 연습해두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습니다. 1963년 존 케이지와 열한 명의 피아니스트들은 이 곡을 15시간 연주하며 사티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어디 음악뿐일까요. 사티는 수많은 그림과 글을 남겼고, 우스꽝스러운 강연과 분노에 찬 외침으로 세상에 맞섰습니다.

    사티에게 희망은 클로드 드뷔시였습니다. 드뷔시 스스로 '서정극'이라 이름 붙인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사티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1903년, 드뷔시는 사티에게 '형식'을 공부하도록 권했고, 사티는 <배 모양을 한 세 곡의 소품>으로 화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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