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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Story

순정의 가곡왕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I

by 정마에Zeongmae 2018.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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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차한 살림이었다.

   거기다가 어린 자식들은 복작거렸다.

   빈의 변두리 초등학교 교장의 수입으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 수입마저 국가에서 제정한 월급제가 아니고 학생들이 납부한 교육비의 일부를 가지고 교사의 생활비와 자신의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 사립학교였다.

   남편보다 일곱 살 위인 아내의 검소하고 야무진 살림살이가 아니고는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살림이었으나 부부간의 애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그들은 열네 명이나 자녀를 보았고 그 중에 살아 남은 자식이 다섯명, 네 째 아들이 프란츠 슈베르트였다.

  프란츠의 할아버지는 시골 농부였고 그의 아버지(Franz Theodor) 역시 농사를 짓다가 임시 교원양성소를 나와 교사가 되었다. 어머니 역시 시골 열쇠장수의 딸이었다. 그러기에 자녀를 열네 명을 낳고 그 중에 아홉이나 자신의 손으로 땅에 묻으면서도 견딜만큼 강한 정신력과 육체를 가질 수 있었고, 프란츠의 다부진 육체와 부지런함도 이러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슈베르트는 어릴 때부터 유달리 키가 작고 토실토실한 소년이었다. 둥근 얼굴에 이마가 튀어나오고 몽글한 코에 어릴 때부터 두꺼운 근시안의 안경을 쓰고 있었다. 다만 그 안경 뒤에 독특한 광채를 던지는 큰 눈이 반짝여서 이채를 띠었다. 

   여섯 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의 성적은 물론 언제나 첫째였다. 교직에 충실하고 가정에 충실했던 프란츠의 아버지는 아들의 유년 시절을 이렇게 기록했다. 

 

   "다섯 살 때부터 집에서 초등 교육을 시작하여 여섯 살 때 정식으로 학교에 입학을 하였는데 성적은 언제나 첫째였다. 어릴 때부터 친구를 좋아해서 틈만 있으면 장난꾸러기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더 없이 좋아했다. 여덟 살때, 나는 그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간단한 이중주 정도는 곧잘 켤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그리고 미하엘 호르첼씨에게 보내어 성악을 배우게 해서 리히텐탈 교회의 성가대에 넣었는데, 호르첼은 이런 제자는 여지껏 받아 본 적이 없다고 눈물을 머금고 칭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말하였다.

    '내가 새 것을 가르치려고 할 때, 그는 대개의 경우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가르친 것이 없죠. 단지 그의 상대가 되어 주고, 잠자코 경탄의 눈을 크게 뜨고 바라다보았을 뿐......'"

<슈베르트의 생가 / 가곡의 왕이라 불리는 슈베르트는 이 곳에서 1797년 1월 31일에 태어나 3년간 살았다>


   그러나 프란츠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아버지와는 달리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만족하게 생각하기는 했으나, 신동을 만들어 한 몫을 보자는 생각은 없었고 결국 자기처럼 교직자로서 인생을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입학만 되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관비(官費)로 일반적인 음악교육과 상류 시민으로서의 교양을 가르치는 콘빅트였다. 이 콘빅트는 지금의 빈소년합창단의 전신으로 오스트리아 궁정 직속 학교였다. 이 선택은 넉넉치 못한데다가 자식은 올망졸망 많기만 한 초등 교육자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1808년, 열한 살의 프란츠는 격심한 경쟁을 물리치고 이 학교에 합격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콘빅트는 프란츠가 음악가가 될 이상적인 온실이었다. 작곡 시간의 지도는 한때 베토벤의 선생이었던 유명한 작곡가 살리에리가 했고, 학생들은 누구나 피아노와 성악을 공부해야 했다. 그리고 학생들만의 오케스트라가 있어서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을 매일같이 접할 수 있었다.

   그의 소질은 순조롭게 뻗어 갔고 작곡에 열중해서 다른 과목을 돌볼 여유까지 없었다, 아버지는 그것이 심히 못마땅했다. 그래서 여러 번 책망을 받은 프란츠는 작곡을 비밀에 부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오선지가 없어서 동창생인 슈파운(J. von Spaun, 슈베르트보다 8살 위)에게 공급을 받은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그것은 슈베르트의 집안이 구차해서만은 아니였다. 아버지에게 떳떳하게 용돈을 탈 수 없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작곡에 몰두한 나머지 학교의 성적은 나날이 떨어지고 비밀이 보전될 수가 없었다. 격노한 아버지는 책망 정도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지 절대로 집에 출입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그래서 1812년, 어머니가 티푸스로 세상을 떠났을 때도 프란츠는 임종의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그 후 금족령(禁足令)은 풀리고 매주 금요일과 일요일 오후에는 현악사중주가 슈베르트 교장댁애서 흘러나왔다. 제1바이올린은 둘째, 제2바이올린 첫째, 비올라는 프란츠, 아버지는 첼로를 연주했다. 물론 리더는 프란츠였다. 가끔 아버지가 틀리게 연주하곤 했다. 그럴 때면 처음엔 그냥 모른 체했다가 다시 틀리 때는 프란츠가 "아버지, 거기가 좀 이상한데요."하고 미소를 지으며 충고를 했다.

   그 이듬해, 열 여섯 살이 된 프란츠는 5년 동안의 콘빅트 생활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링크한 음악은 슈베르트의 첫 작품인 Fantasy in G Major, D.1이다.

1810년 4월 8일 ~ 5월 1일(13세) 작곡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슈베르트의 작품 1,000여 곡중 가장 어렸을 때의 것으로

출판된 것은 사후 60년 만인 1888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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