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지식과 지혜를 찾아서

<열하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What can "Yeolha-ilgi" give us?

by 정마에Zeongmae 2024. 2. 2.
728x90
반응형

    박지원은 문학가로서 그리고 개혁 사상가로서 살아갔습니다. 그의 사상 이 담긴 <연암집>은 그가 죽은 뒤 불온한 사상이 담긴 금서처럼 취급되었습니다. 개화사상의 대부였던 손자 박규수까지도 할아버지의 문집을 발간하자는 동생의 제안을 공연히 말썽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거절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1900년이 되어서야 박지원의 글이 세상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왼쪽)와 그의 초상화.(출처 : 한국경제)

 

   그의 사상에는 첫째로 양반과 상민의 신분 차별을 타파하려는 열망이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는 하늘이 어떤 사람들에게만 특별히 재능을 내려 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서얼들에 대한 차별 대우를 철폐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소설을 통해 양반 관료의 무능과 부패를 지적했고, 민중들의 희생 위에 서 있는 계급제도의 부조리를 고발했습니다.

    둘째로 대의명분을 앞세워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주자학자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박지원은 당시 사대부들을 '우물 안 개구리'나 '논 밭에 돌아다니는 들쥐'에 비유하면서,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오랑캐에게서라도 배워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박지원이 외국의 선진 문물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외세 의존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강한 민족의식을 토대로 오로지 나라와 민중의 이익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겉으로는 도덕을 내세우면서도 속으로는 온갖 욕심에서 제멋대로 못된 짓을 해 대는 주자학의 형식주의를 타파하고, 실용적이며 실제적인 인간상을 세우려 했습니다. 박지원이 볼 때 주자학자들의 도덕은 권위 주의적이며 자기 방어적인 윤리 체계일 뿐이었습니다.

    이같은 박지원의 사상은 박제가, 이덕무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박제가는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소비 억제와 절약과 검소를 강조했던 것과 달리 "쓸 줄 모르면 만들어 내지 않게 되고, 만들어 낼 줄 모르면 백성들의 삶이 날로 가난해진다."라고 했고, "재물이란 우물과 같아서 자꾸 퍼 쓰면 물이 계속 솟지만 쓰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는 "비단을 입지 않으면 비단 짜는 일이 퇴보하고, 찌그러지고 깨진 그릇을 쓰면 대장장이나 옹기장이가 어려워진다."라고 했습니다.

    박지원은 자신의 사상을 실현해 볼 수 있을 정도의 벼슬에 오르지도 못 했고, 본인이 직접 실천에 나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박제가를 통해 이어진 박지원의 사상은 뒷날 개화사상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개화사상 가 대부분이 조선의 멸망과 함께 친일로 넘어간 사례를 볼 때 그들이 박지원 사상의 겉만 보고 그 속에 담긴 강한 민족의식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 「길 가는 대로 붓 가는 대로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에서

▲  1780년 박지원 일행이, 청나라 황제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려고, 황제의 여름 별장인 열하까지 갔던 일정


    Park Ji-won lived as a literary man and a reformist. After his death, Yeonamjip, which contained his thoughts, was treated like a golden book containing disturbing thoughts. Even his grandson Park Gyu-soo, the godfather of enlightenment, refused his younger brother's proposal to publish an anthology of his grandfather's writings, saying there was no need to cause trouble. It wasn't until 1900 that Park Ji-won's writings came to light in the world.

    First, his thoughts strongly contain the desire to break down the discrimination between the noble class and the common people. He said that the sky does not give away talents to only certain people, and he urged them to abolish discrimination against them. Through his novels, he pointed out the incompetence and corruption of the Yangban bureaucracy and accused the absurdity of the class system at the expense of the people.

    Second, he strongly criticized the mainstream scholars who tried to protect their vested interests by using causes. Park Ji-won compared the four godfathers at the time to 'frogs in the well' or 'bull rats wandering in the paddy fields', stating that if it was good for the people and good for the country, you should learn from barbarians. However, Park Ji-won was not a foreign-dependent person who blindly followed advanced foreign cultures. He focused solely on the interests of the country and the people based on a strong national consciousness.

    Third, he tried to break the formalism of Neo-Confucianism, which promotes morality on the outside but does wrong arbitrarily on the inside out of all kinds of greed, and to establish a practical and practical human image. In Park Ji-won's view, the morality of Neo-Confucianists was only an authoritarian and self-defensive ethical system.

    Park Ji-won's idea led to Park Je-ga and Lee Deok-moo. Contrary to what most sutras emphasized about restraining consumption, saving, and frugality, Park Je-ga said, "If you don't know how to use it, you don't make it, and if you don't know how to make it, the lives of the people become increasingly poor." He said, "Treasure is like a well, so if you keep scooping it up, water will continue to rise, but if you don't use it, it will dry up." Specifically, he said, "If you don't wear a silk cloth, silk weaving degenerates, and if you use a crushed and broken bowl, it becomes difficult for a blacksmith or a blacksmith."

    Park Ji-won did not become a government official enough to realize his ideas, nor did he put it into practice himself. However, Park Ji-won's ideas that continued through the Park Je-ga became the root of the enlightenment ideology in the future. Given the case where most of the enlightenment ideology was transferred to pro-Japanese with the fall of the Joseon Dynasty, it is regrettable that they did not see the strong national consciousness contained in Park Ji-won's ideology only by looking at the outside.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