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베토벤 현악4중주 제14번, Op.131 악보를 꺼내들었습니다. 학생시절 그의 후기 현악4중주들에서 영감을 받곤 했었죠. 분석할수록 감탄을 하면서 말이죠. 특히 이 작품과 현악4중주 제15번, Op.132 는 제게 많은 양향을 끼쳤었습니다. 치밀한 구성과 새로운 시도들은 제겐 경이 그 자체였습니다.
50을 넘긴 베토벤은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비롯한 거의 모든 장르의 창작을 마무리하고, 필생의 역작인 ‘합창 교향곡’과 ‘장엄 미사곡 D장조’의 마무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갈리친(N.Galizyn) 후작이 현악 4중주 작곡을 위촉했고, 이를 계기로 베토벤은 마지막으로 ‘고백과 정리의 세계’에 몰두하게 되죠.
처음에는 두세 곡 정도를 예정했었지만 작업이 진행될수록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아이디어가 계획을 변경시켰고, 그 결과 작품 127, 130, 131, 132, 135 등 다섯 곡의 새로운 현악 4중주곡과 ‘작품 130’에서 떨어져 나온 ‘대푸가’ B♭장조 Op.133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여섯 곡이 바로 베토벤의 ‘후기 4중주’로서, 그의 예술세계를 총결산했을 뿐 아니라 이 장르에서 전무후무한 지고와 심연의 경지에 도달한 서양음악사 최고의 걸작들입니다.
그 중 제14번 C♯단조 Op.131은 중도에 쉼 없이 계속 연주되는 일곱 개의 악장이라는 극단적인 구성으로 작곡되었습니다. 이 곡은 갈리친 후작의 의뢰와는 무관하게 베토벤이 자발적으로 작곡하여 슈투터하임 남작에게 헌정했으며, 베토벤이 자신의 후기 4중주곡들 가운데 가장 좋아했던 곡이자 슈베르트가 임종 전에 듣기를 원했던 곡으로 알려져 있죠.
아울러 이 곡은 베토벤의 가장 난해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곡은 서로 연결된 일곱 개의 악장으로 강력하게 일체화된 구조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여섯 개의 상이한 주조성, 서른한 번의 박자 변경, 복잡다단한 텍스처, 악장 내에서도 다양하게 변화하는 형식(푸가, 조곡, 레치타티보, 변주, 스케르초, 아리아, 소나타 형식) 등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베토벤은 여기서 극단적인 단절과 해체를 통해서 정반대편의 응집력과 통합성으로 회귀하는 궁극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영화 ‘마지막 4중주’에서는 이 곡이 마치 ‘인생’을 암시하고 투영하는 거울처럼 등장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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