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면, 나는 MBTI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을 네 글자로 설명한다는 발상이 늘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 "나 ENFP야"라고 하면 그냥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그게 뭘 설명해 주는 거지?' 싶었다. 유행처럼 번지는 것을 보면서도 한발짝 물러서 있었다.
그런데 오늘, 생각지도 않게 그걸 해봤다.
딸과 함께 TV를 보고 있었는데 출연자들이 저마다 MBTI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 다 FP라서 이렇게 말이 잘 통하잖아"라며 웃는 장면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 한 번쯤은 해도 나쁘지 않겠다고.
기대는 없었다. 그냥 심심풀이였다.
결과는 INTP 51%, 그리고 INFJ 성향도 함께 보인다고 나왔다.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설명을 읽어 내려가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오랫동안 내 옆에 앉아 나를 관찰하다가 조용히 적어둔 메모 같았다.
본질과 구조를 파악하려는 성향. 의미 없는 일에는 오래 버티지 못하는 성향. 혼자 깊이 파고드는 시간이 필요한 성향. 그리고 지식을 탐구하다 결국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성향.

읽다가 갑자기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내 대학 때 전공은 작곡이다. 공부만 한 게 아니라 영화음악, 방송음악, 게임음악 실제 작업도 꽤 했다. 계속 그 길로 갈 수 있는 기회도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길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왜 그랬을까. 누가 물으면 늘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내 길이 아닌 것 같았어요." 하지만 말하면서도 나 자신조차 그 이유를 정확히 몰랐다. 기회가 있었는데 왜 그쪽으로 가지 않았는지.
오늘 MBTI 설명을 읽으면서 그때가 조금 이해됐다.
이런 성향의 사람은 잘 되는 길보다 의미가 느껴지는 길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잘 되느냐보다 내가 거기서 무언가를 진심으로 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 곳에 머물지 않았다. 지휘를 했고, 음악을 분석했고, 작곡을 계속했으며, 가르쳤다. 그리고 지금은 비즈니스 전략을 다루는 일도 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전혀 다른 세계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음악과 전략. 예술과 비즈니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둘 사이에는 생각보다 넓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결국은 구조를 읽는 일이다. 음악에서 나는 늘 화성의 흐름, 형식의 균형, 작품 전체가 만들어 내는 구조에 끌렸다. 전략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현상을 분석하고, 그 안의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다.
두 세계는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MBTI 네 글자가 나를 다 설명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이 작은 검사는 적어도 하나의 실마리를 던져줬다.
아, 내가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구나.
어쩌면 우리는 평생 자신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반복하면서 사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끔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 단서를 만나기도 한다.
오늘 나에게는 딸과 함께 본 TV 한 장면, 그리고 심심풀이로 해본 MBTI 검사가 그 계기였다.
덕분에 나는 이제 나 자신을 조금 더 또렷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의 구조를 이해하고 싶어서 생각하고, 그 의미를 음악과 전략으로 표현하려는 사람.
아마 나는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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