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T.S. 엘리엇의 이 첫 구절은 문학이라는 지형에 새겨진 거대한 균열처럼 존재해왔습니다. '황무지’는 단순한 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신과 의미를 잃어버린 한 시대의 파편화된 영혼 그 자체였죠. 비통함, 상실감, 그리고 부서진 이미지들로 가득한 이 기념비적인 작품을 읽을 때면, 우리는 종종 그 이면에 흐르는 어떤 소리를 상상하게 됩니다. 만약 이 황량한 단어들이 선율을 만난다면, 그것은 어떤 노래가 될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매우 이질적인 협업을 시도했습니다. 한쪽에는 20세기 모더니즘의 거장 T.S. 엘리엇과 19세기 낭만주의 가곡의 왕 프란츠 슈베르트를,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21세기의 가장 논쟁적인 창조 도구인 인공지능(AI)을 세웠습니다.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AI를 이용해 '황무지’를 슈베르트풍의 비가(悲歌)로 만드는 것. 이것은 예술에 대한 경의일까요, 아니면 신성모독일까요? 어쩌면 그 둘 다일지도 모릅니다.
디지털 연금술: 왜 슈베르트인가?
'황무지’를 음악으로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새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트라빈스키의 격렬함이나 쇤베르크의 불협화음이 아닌, 슈베르트의 깊은 우울과 서정성을 원했습니다. 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Winterreise)'를 떠올려보세요. 사랑에 버림받고 눈 덮인 황야를 정처 없이 헤매는 한 남자의 노래. 그 실존적 고독과 내면의 풍경은 엘리엇의 정신적 황무지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습니다. 엘리엇의 시가 부서진 문명의 파편들을 콜라주한다면, 슈베르트의 음악은 그 파편들 사이를 흐르는 상실의 강물과도 같습니다.
저는 이 아이디어를 들고 AI를 찾았습니다. 제 역할은 작곡가가 아닌, ‘감독’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AI에게 단순히 "노래를 만들어 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저는 프롬프트를 통해 두 거장의 망령을 소환하려 했습니다.
“슈베르트풍의 어둡고 드라마틱한 예술 가곡. 힘 있는 남성 바리톤과 기교적이고 표현력 넘치는 피아노 반주. 어둡고, 쓸쓸하며, 연극적인 분위기…”
여기에 엘리엇의 시 전체를 가사로 입력했습니다. 몇 분 후, AI가 첫 번째 결과물을 뱉어냈을 때 저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것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있었습니다’. AI 바리톤의 목소리에는 시의 무게에 짓눌린 듯한 피로감이 서려 있었고, 피아노는 때로는 마른 땅처럼 메마르게, 때로는 갑작스러운 소나기처럼 격렬하게 울부짖었습니다. 제가 상상했던, 바로 그 '황무지의 소리’였습니다.
환영의 시각화: ImageFX의 붓질
음악이 영혼이라면, 이미지는 그 영혼이 머무는 육체입니다. 저는 이 노래에 시각적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이미지 생성 AI인 ImageFX를 활용했습니다. 단순히 시의 내용을 설명하는 삽화가 아닌, 음악과 시의 정서를 증폭시키는 '감정의 풍경’을 원했습니다.
저는 또다시 감독이 되어, 위대한 화가들의 화풍을 빌려왔습니다.
- 컷 #1: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 저는 앤드루 와이어스의 고독한 사실주의를 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AI는 메마른 땅을 뚫고 위태롭게 피어난 라일락 한 송이를 그려냈습니다. 그 연약한 보라색은 잔인한 희망처럼 보였습니다.
- 컷 #2: “한 줌의 흙에서 공포를 보여주리라”
- 르네상스 시대의 ‘바니타스’ 정물화 스타일을 요청했습니다. AI는 바랜 타로 카드, 부서진 조각상, 말라비틀어진 히아신스가 놓인 테이블을 창조했습니다. 빛 한 줄기가 먼지 쌓인 사물들 위로 쏟아지며 시간의 허무함을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 컷 #3: “환영의 도시”
- 단테의 ‘지옥’ 삽화로 유명한 귀스타브 도레의 어두운 판화 스타일을 소환했습니다. AI는 짙은 안개 속, 런던 다리 위를 끝없이 흘러가는 유령 같은 군중의 행렬을 그려냈습니다. 그 누구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망령과의 협업, 그 너머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저는 깨달았습니다. AI는 단순히 버튼을 누르면 결과물이 나오는 자판기가 아니라는 것을요. 그것은 거대한 도서관이자, 숙련된 연주자이며,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조수입니다. AI는 슈베르트의 모든 작품과 도레의 모든 판화를 ‘알고’ 있지만, 무엇을 그려야 할지, 어떤 감정을 표현해야 할지는 알지 못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의도’와 '미감’이 개입합니다. 프롬프트를 작성하고, 수많은 결과물 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것들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내는 모든 과정은 명백히 인간의 창조적 행위입니다.
결과물은 엘리엇이나 슈베르트의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예술적 유전자(DNA)를 물려받은, 21세기에 태어난 새로운 혼종(hybrid)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예술의 미래일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위대한 영혼들을 우리의 디지털 작업실로 초대하여, 그들의 손으로는 결코 만들 수 없었던 새로운 작품을 함께 빚어내는 것.
이 인공적인 목소리가 노래하는 '황무지’를 들으며,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할까요? 기술이 예술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는 불안감? 아니면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이 가장 새로운 기술을 통해 되살아나는 경이로움?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직접 듣고, 보시고, 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망령과의 협업이 당신의 마음속 황무지에는 어떤 소리를 남기는지 귀 기울여 보시길 바랍니다.
https://youtu.be/Qosab4L-gZg?si=f_LiRexEwia-CvR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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