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가는 두 개의 시간을 산다. 하나는 생계를 위해 흘러가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악보 위에 새겨진 진실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현실은 가혹하게도 전자만을 허락하고, 후자는 사치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악보는 단순한 기호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작곡가가 남긴 암호이자, 시대가 품은 감정의 지문이며, 연주자에게 건네는 은밀한 편지다. 멜로디의 상승과 하강 속에는 갈망과 체념이 숨어 있고, 화성의 긴장과 해소 안에는 인간 감정의 미묘한 결들이 담겨 있다. 리듬은 심장 박동처럼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때로는 불안을, 때로는 확신을 속삭인다.
이 메시지들은 가사처럼 직설적이지 않다. 오히려 더 근원적이고 보편적이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문화의 경계를 가로질러, 듣는 이의 무의식 깊은 곳에 직접 닿는다. 베토벤의 화음 진행은 ‘투쟁’이라는 단어 없이도 저항의 의지를 전하고, 쇼팽의 루바토는 ‘그리움’이라는 표현 없이도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연주자의 임무는 명확하다. 악보에 새겨진 이 비언어적 메시지를 정확히 읽어내고, 자신의 연주를 통해 청중에게 전달하는 것. 이것은 번역가의 작업과도 같다. 아니,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원문과 번역문 사이에 사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깊은 탐구와 반복된 연습, 그리고 예민한 감수성만이 그 메시지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악보를 들여다볼 시간이 없다. 삶을 지탱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음악을 하기 위해 음악이 아닌 일들에 시간을 쏟아야 하는 아이러니. 이것은 단지 개인의 불운이 아니다. 예술을 사치로 취급하는 사회구조의 필연적 결과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시간의 결핍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적 여유의 부재이고, 깊이 있는 사색의 불가능이며, 예술적 직관이 자라날 토양의 메마름이다. 서둘러 악보를 훑어보고,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고, 형식적으로 연주를 끝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악보 속 진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까? 작곡가의 의도와 시대의 정신, 그리고 음악 그 자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이 딜레마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생계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음악 안의 진실을 외면하며 살 수도 없다. 결국 남는 것은 부족한 시간 속에서도 악보와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그리고 언젠가는 충분히 깊이 파고들 수 있을 거라는 희망뿐이다.
어쩌면 이 갈증 자체가, 이 절박함 자체가 음악가를 음악가답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악보 속 메시지를 찾아내고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 시간이 부족해도, 여건이 불완전해도, 그 책임을 저버릴 수 없다는 무게. 그것이 결국 우리를 악보 앞으로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힘이 아닐까.
https://youtu.be/fGPbZdrV1SM?si=ScNR-ne3XPBRuGd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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