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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Story

성과 속의 미(Sacred and Profane Beauty)

by 정마에Zeongmae 2018.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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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적 예술품’ 열 가운데 아홉은 성과 속 사이의 아무런 내적이고 본질적 연속의 증거를 보여 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분명히 매우 세련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순전히 외부적인 연관만 가진다. 그 관련성은 예술을 다치거나 종교를 욕되게 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둘의 통일성을 선포하지도 않는다.


▲ Bach-마태수난곡과 Wagner-파르지팔 악보 첫 페이지


   나는 의도적으로 위대한 예술에서 예를 취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St. Matthew Passion)”과 바그너의 “파르지팔(Parsifal)”은 둘 다 나름대로 최고 수준의 종교 예술이다. 그러나 종교와 예술 사이의 유기적 연관, 즉 신성과 아름다움이 어울려 흐름이 악보의 모든 페이지에서 함께 발견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일 수 있다. 그와 반대로 두 요소의 온전한 상호 관통은 이 작품상 극히 제한된 곳에서만 나타난다. 예수의 애통과 성배를 위한 암포르타스(Amfortas)의 통곡은 종교적 주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슬픔의 노래들은 그로 인해 그 자체 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거룩함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순전히 인간적 슬픔의 표현일 수 있다. 수난곡의 영광스런 이중창인 “그렇게 나의 예수는 이제 돌아가셨다(So ist mein Jesus nun gegangen)”는 지금까지 작곡된 음악 중 최고로 강렬한 것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신비와는 무관한 주제를 가리킬 수 있다. 유일한 종교적 효과는 가사에 있다. 반대로 “진실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Wahrich, dieser ist Gottes Shon grwesen)”라는 짧은 합창은 위엄찬 가사의 훌륭한 찬양을 통해서 우리에게 거룩함을 아주 가깝게 가져온다. ... 베토벤 교향곡 9번의 마지막 악장 합창부에서 나오는 다소조야한 이신론적 열광은 종교적 음악이다. 반면 모든 교회에서 설교 후에 연주하면 상당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바, 그것 바로 앞에 나오는 영광스러운 아다지오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 헤랄두스 반 더 레우, 성과 속의 미,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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