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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에세이: 《마음을 길어 올리다》 - 오늘도 음악이 말을 건다

물안개가 건네준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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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용문으로 향했다. 거의 매달 한 번은 아버님의 묘소를 찾아 주변을 정리하곤 했는데, 올해는 이런저런 일에 밀려 오늘에서야 처음 발걸음을 옮겼다. 늘 마음 한편에는 작은 빚처럼 미안함이 남아 있었다.

집을 나설 때부터 하늘은 맑지 않았다. 비가 오락가락하니 딸은 "다음에 날 좋은 때 다녀오세요."라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오늘 가지 않으면 '다음’은 또 다른 다음으로 미뤄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해야 할 일은 마음이 움직였을 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양수리를 지날 무렵, 강 위로 옅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산과 강의 경계는 흐려지고, 잔잔한 물 위를 안개가 천천히 흘러갔다. 세상이 한 폭의 수묵화가 된 듯했다. 차를 잠시 늦추고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비를 핑계 삼아 집에 머물렀다면, 나는 이 아름다운 아침을 평생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불편함을 피하려 하지만, 삶은 오히려 그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한 사람에게만 조용한 선물을 건네는지도 모른다.

묘소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고장 났던 예초기는 이번에도 가져오지 않았다. 대신 처음부터 전지가위를 손에 들었다.

한 줄기씩 풀을 자르고, 다시 허리를 굽혀 또 한 줄기를 잘라낸다. 기계라면 몇 분이면 끝날 일이지만, 전지가위는 손의 힘과 시간, 그리고 인내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느린 작업이 싫지 않았다.

가위가 풀을 자르는 사각거리는 소리,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랫소리…. 자연은 아무런 지휘자도 없이 완벽한 앙상블을 들려주고 있었다.

땀은 비 오듯 흘렀고 옷은 흠뻑 젖었다. 하지만 풀 한 포기씩 정리될 때마다 마음속에 자라나 있던 미안함도 함께 잘려 나가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성묘는 묘를 돌보는 일이 아니다. 내 마음을 돌보는 일이다. 부모님께 효도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잊지 않고 찾아가는 발걸음 속에 있고, 그렇게 묘를 깨끗이 정리하는 동안 정작 정리된 것은 아버님의 자리가 아니라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내 마음이었다.

음악을 하며 오래 배운 것이 하나 있다.

빠른 패시지보다 느린 악장이 사람의 마음을 더 깊이 움직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속도는 기술이지만, 여백은 마음이다.

오늘 전지가위로 풀을 베는 시간도 그랬다. 조금 더 힘들었고, 조금 더 오래 걸렸지만, 그만큼 더 오래 아버님과 함께할 수 있었다. 빠르게 끝냈다면 지나쳤을 생각들이 느린 손끝을 따라 하나둘 떠올랐다.

돌아오는 길, 아침의 물안개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으로 옮겨와 있었다.

오늘 나는 묘소를 정리하러 갔다가 물안개를 선물 받았고, 풀을 베러 갔다가 내 마음을 다듬고 돌아왔다.

비에 젖은 하루였지만, 마음만은 햇볕에 잘 말린 빨래처럼 뽀송뽀송했다.


🎵 오늘의 음악


Edward Elgar – Nimrod (Enigma Variations, Op. 36)

엘가의 〈님로드〉는 처음부터 감정을 쏟아내지 않는다. 아주 조용한 현악기의 화음 위에 선율이 한 걸음씩 걸어 나오며, 서서히 시야를 넓혀 간다. 마치 새벽 강가에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모든 것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바라보게 만드는 음악이다.

오늘 양수리에서 만난 물안개는 풍경을 흐리게 했지만, 그 속에서 산과 강은 더욱 아름다웠다. 묘소에서 전지가위를 들고 천천히 풀을 베던 시간도 그러했다. 빠른 기계의 소음 대신 손끝의 리듬이 흐르자, 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바람 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오래전 아버님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하나둘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님로드〉는 슬픔의 음악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을 기억의 안개 속에서 천천히 떠오르게 하는 음악이다.

오늘 나는 그 음악을 들으며 한 사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기억하는 삶의 태도를 배웠다. 서두르지 않는 선율처럼,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이 가장 깊은 사랑을 완성한다는 것을 말이다.

기억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걸어가 다시 만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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