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팅을 마치고 성수동의 오래된 골목길을 돌아 식당으로 향했다.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은 유리 외벽의 신축 오피스 빌딩과 그 바로 옆으로 이어지는 낮고 좁은 골목길. 가장 새로운 도시와 가장 오래된 시간이 서로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듯한 풍경이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늦추었다.
골목을 걷는 순간, 어린 시절이 불쑥 걸어 나왔다. 친구들과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니던 오후, 손바닥만 한 구슬 하나에 온 마음을 걸었던 구슬치기, 납작한 돌을 세워 맞히던 비석치기, 종이 한 장으로 승부를 겨루던 딱지놀이…. 지금 생각하면 참 소박한 놀이였지만, 그 시절 우리에게는 세상 어떤 놀이공원보다도 넓은 놀이터였다.
신기한 것은 골목의 크기가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이었다. 돌아보면 자동차 한 대 지나가기에도 비좁은 길인데, 그때는 끝없이 펼쳐진 운동장처럼 느껴졌다. 세상은 작았지만 상상력은 컸고, 가진 것은 많지 않았지만 웃음만큼은 늘 넘쳐났다.
이제 그 골목에는 아이들의 발자국 대신 바쁜 사람들의 걸음이 오가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어른들의 시선만 분주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귀에는 여전히 그 웃음이 선명하다.
시간은 골목의 풍경을 바꾸었지만, 추억의 소리까지 지우지는 못한 모양이다. 건물은 새로 지을 수 있어도, 그 안에서 흘러간 시간까지 새로 지을 수는 없다. 오래된 골목이 아름다운 이유도 벽돌이나 담장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켜켜이 쌓인 삶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음악도 그렇다.
악보에는 음표만 남아 있지만, 그 음표를 듣는 순간 우리는 어느 계절의 어느 날을 떠올리고, 오래전 함께했던 사람을 기억하며,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난다. 음악은 시간을 저장하는 예술이고, 추억은 마음속에서 다시 연주되는 선율이다.
오늘 성수동의 오래된 골목은 내게 오래된 동요 한 곡을 들려주었다. 아무도 노래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합창처럼 울려 퍼졌다.
골목은 변해도,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사람은 앞으로만 걸어가는 존재가 아니라, 추억을 품은 채 오늘을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
🎹 오늘의 음악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어린이 정경(Kinderszenen), Op.15》 중 제7곡 〈트로이메라이(Träumerei, 꿈)〉
슈만은 이 곡을 두고 아이를 위한 음악이 아니라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어른을 위한 음악이라 말한 바 있다. 그래서일까, 《어린이 정경》에는 화려한 기교보다 잔잔한 그리움이 흐른다. 단순한 선율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며 조금씩 다른 빛깔로 물드는 〈트로이메라이〉는, 마치 한 장면을 떠올리고 또 떠올리며 그 기억을 어루만지는 마음의 몸짓과도 닮아 있다.
성수동의 오래된 골목을 걷다 문득 들려온 아이들의 웃음처럼, 〈트로이메라이〉 역시 잊고 있던 시간을 우리 곁으로 데려온다. 눈앞의 풍경은 달라졌지만, 마음속 골목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이 음악은 말없이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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