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이다.
창밖은 이미 하루를 접었지만, 내 책상 위에는 아직 작은 하루 하나가 남아 있다. 나는 조용히 연필을 집어 들고, 칼을 꺼내 천천히 깎기 시작한다.
나무가 얇게 말려 나오며 책상 위에 내려앉는다. 갓 드러난 나무의 향이 은은하게 번지고, 검은 흑연심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이 짧은 시간이 나는 참 좋다.
누군가는 이 시간을 준비라고 말하겠지만, 내게는 조금 다르다. 연필을 깎는 시간은 음악을 쓰기 전에 나 자신을 조율하는 시간이다.
나는 지금도 오선지에 작곡을 시작할 때면 언제나 연필을 쓴다. 처음 작곡을 배우던 학생 시절부터 시작된 습관이 어느덧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지나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많은 것이 변했다. 잉크 대신 디지털 펜이 생겼고, 오선지 대신 모니터가 생겼다. 클릭 한 번이면 악보가 완성되고, 인공지능이 화성을 제안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음악의 첫 음만큼은 아직도 연필 끝에서 태어나야 마음이 놓인다.
나는 필기구를 좋아한다. 누군가는 만년필을 수집하고, 누군가는 고급 볼펜을 좋아한다. 나 역시 좋은 펜을 보면 마음이 움직이고,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펜촉의 감촉도 좋아한다. 하지만 순서를 묻는다면 언제나 같다. 첫 번째는 연필, 두 번째가 펜이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펜은 종이 위에 잉크를 남긴다.
연필은 종이와 대화를 나눈다.
연필은 종이를 밀어붙이지 않는다. 종이의 결을 따라가며 조용히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손끝에 전해지는 미세한 저항, 흑연이 종이를 스치는 사각거림, 힘의 세기에 따라 달라지는 선의 농담…. 나는 그 모든 감각을 사랑한다. 어쩌면 나는 작곡가이기보다 한 사람의 장인으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내게 음악은 머리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손끝에서도 만들어진다. 연필을 쥔 손이 종이 위를 천천히 걸어갈 때, 생각은 비로소 선율이 된다. 아직 들리지 않는 음악이 손끝을 지나 검은 점과 선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을 했다. 연주자에게는 악기가 있고, 지휘자에게는 지휘봉이 있다. 그렇다면 작곡가에게 가장 오래된 악기는 무엇일까. 나는 주저 없이 연필이라고 말하고 싶다.
연필은 음표를 적는 도구가 아니라, 음악을 탄생시키는 악기였다.
또 하나 연필을 사랑하는 이유가 있다. 연필은 틀릴 자유를 허락한다.
좋은 작품은 처음부터 완성되지 않는다. 한 음을 지우고, 다시 적고, 화성을 바꾸고, 리듬을 고치며 수없이 망설인다. 작곡이란 어쩌면 좋은 음을 찾는 작업이 아니라, 필요 없는 음을 지워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연필은 그 과정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괜찮습니다. 다시 쓰시면 됩니다."
말없이 그렇게 등을 토닥여 주는 오래된 친구 같다.
그래서 연필 자국이 지워진 자리에는 희미한 흔적이 남는다. 나는 그 흔적을 좋아한다. 그것은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생각의 흔적이다.
사람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지워 버리고 싶은 날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만들어졌고, 수없이 고쳐 쓴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음악이 태어났다.
컴퓨터에서는 Delete 키를 누르면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연필은 지운 자리에도 작은 기억 하나를 남겨 둔다. 나는 그 다정함이 좋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왜 아직도 손으로 작곡하세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음악은 귀보다 손끝에서 먼저 태어나는 것 같아서요."
물론 언젠가는 나도 더 많은 작업을 디지털로 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새로운 곡의 첫 음표만큼은 여전히 연필이 맡게 될 것이다.
작곡가에게는 악기가 필요하다. 피아노도 아니고 지휘봉도 아닌, 내가 가장 오래, 가장 많이 함께해 온 그 악기는 결국 연필이었다.
오늘 밤도 나는 연필을 깎는다.
좋은 곡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좋은 마음으로 음악을 만나기 위해서다.
어쩌면 우리가 매일 손에 쥐는 가장 작은 도구 하나가, 결국 우리 인생을 만들어 가는 가장 큰 악기인지도 모른다.
🎼 오늘의 음악
요하네스 브람스 – 인터메초 Op.118 No.2
브람스의 음악에는 연필을 닮은 질감이 있다. 화려하게 빛나기보다 오래 손에 쥐고 싶은 온기, 조용하지만 깊이 스며드는 울림이 있다. 이 곡을 들으며 연필을 한 자루 깎아 보자. 어쩌면 음악은 피아노에서가 아니라, 연필 끝에서 먼저 시작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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