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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아'(2014)의 성경적 고증 문제 — 창작의 자유와 원전 왜곡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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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어제 밤, 별다른 기대 없이 넷플릭스를 열었다가 영화 '노아'(2014)를 보게 되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성경의 노아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긴 대작이라는 것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돌과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석상 형태의 존재들이 방주 건조를 돕고, 함이 짝을 구하지 못해 아버지 노아와 격렬하게 대립하며, 방주 안에서 갓 태어난 쌍둥이 여아를 노아가 죽이려 한다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분명 성경을 원전으로 한 영화라고 했는데, 내가 알고 있는 창세기의 노아 이야기와는 너무나 달랐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의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과연 이런 연출은 왜 있게 된 것일까? 감독은 무슨 근거로 이러한 장면들을 성경 이야기 안에 집어넣은 것일까?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인가, 아니면 어딘가에 문헌적 근거라도 있는 것인가? 그리고 만약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정당한 각색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인가? 이 글은 그 의문들을 하나씩 풀어보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첫 번째 문제 — '감시자'의 등장과 방주 건조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성경적 이탈은 '감시자(The Watchers)'의 등장이다. 영화 속 감시자는 타락하여 지상에 내려온 천사들이 돌과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석상 형태로 변한 존재로, 노아의 방주 건조를 직접 도와 단기간에 완성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이 설정의 문헌적 뿌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구약 외경인 에녹서에는 '감시자(이르)'라 불리는 천사들이 지상에 내려와 타락했다는 이야기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타락한 천사로 보는 유대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이 에녹서의 전통에서 감시자 개념을 차용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에녹서 전통에서조차 감시자들은 기본적으로 심판을 받는 타락한 존재이며, 오히려 홍수 심판의 원인을 제공한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들이 노아를 돕는 구원의 조력자로 등장하는 것은 원전의 맥락을 편의적으로 재조합한 것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성경 창세기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명확하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직접 설계도를 주셨고(창 6:14~16),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22)는 말씀으로 방주 건조를 마무리한다. 초자연적 조력자에 대한 암시는 어디에도 없다. 노아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이 묵묵한 순종, 즉 아무도 믿지 않는 시대에 홀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수십 년, 혹은 1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인내하며 방주를 지은 노아와 그 가족의 신앙에 있다. 감시자의 개입은 이 핵심 메시지를 정면으로 희석시켜 버린다. 결국 감시자 설정은 "8명이 어떻게 그 거대한 배를 지을 수 있었느냐"는 관객의 현실적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영화적 편의 장치이며, 신학적·문헌적 타당성을 갖춘 해석이라고 보기 어렵다.

두 번째 문제 — 함의 여자 문제와 노아와의 대립

영화에서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은 자신의 여자를 구하는 문제로 노아와 심각하게 대립한다. 함은 방주에 함께 탈 짝을 원했으나 노아에게 거부당하고, 이로 인해 깊은 분노와 배신감을 품게 된다. 영화는 이 갈등을 주요 서사 축으로 삼아 함이 악당 두발가인과 연대하는 방향으로까지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이와 전혀 다른 그림을 제시한다. 창세기 7:7은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라고 기록한다. 여기서 "며느리들"이라는 표현이 결정적이다. 홍수가 시작되기 전,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은 이미 각자의 아내를 두고 있었다. 창세기 6:18에서도 하나님은 노아에게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이 함께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신다. 즉 방주에 탑승한 여덟 명은 노아 부부, 그리고 세 아들과 각각의 아내, 총 여덟 명으로 이미 확정된 구성이었다.

따라서 함이 방주에 탈 짝을 구하지 못해 아버지와 갈등한다는 영화의 설정은 성경 본문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 역시 드라마틱한 갈등 구조를 만들기 위한 창작적 선택임이 분명하지만, 그 과정에서 성경이 명시적으로 기록한 사실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각색'의 범위를 넘어선다. 성경의 노아 가족은 이미 완성된 공동체로서 함께 방주에 올랐으며, 그 안에서의 불화와 갈등은 성경이 묘사하는 바가 아니다.

세 번째 문제 — 쌍둥이 여아의 출생과 살해 위기 장면

영화의 후반부에는 성경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장면이 등장한다. 셈의 아내 일라가 방주 안에서 쌍둥이 여아를 출산하고, 노아가 인류를 멸절시켜야 한다는 신념 아래 이 갓난아이들을 죽이려 한다는 내용이다. 노아가 결국 아이들을 죽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지만, 이 장면 자체가 성경의 노아와는 전혀 다른 인물을 묘사한다.

성경의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창 6:9)로 소개된다. 물론 그도 홍수 이후 포도주에 취하는 등 인간적 약함을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갓난아이를 살해하려 한다는 설정은 성경의 노아상과 근본적으로 양립하기 어렵다. 영화는 노아를 일종의 광신적이고 극단적인 인물로 묘사하는데, 이는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노아를 단순한 신앙의 영웅이 아니라 복잡하고 모순된 인간으로 재해석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도 자체가 예술적으로 전혀 무가치하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이것이 성경 이야기의 재현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왜 이런 연출이 나왔는가 — 감독의 의도와 한계

이 세 가지 문제를 관통하는 공통된 질문이 있다.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대체 왜 이런 연출을 선택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답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서사적 필요다. 성경의 노아 이야기는 사건의 개요를 간결하게 전달할 뿐, 인물들의 심리나 갈등, 방주 건조의 구체적인 과정 등을 상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두 시간짜리 극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빈 공간을 채워야 했고, 감독은 감시자, 함의 갈등, 쌍둥이 살해 위기 등의 요소로 그 공백을 메웠다. 이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창작적 선택이다.

둘째는 세속적 인간주의적 세계관이다.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밝힌 바 있으며, 그의 관심은 신앙 그 자체보다 인간 내면의 어둠과 갈등, 그리고 도덕적 딜레마에 있다. 그에게 노아는 신앙의 아이콘이 아니라 극단적 신념에 사로잡힌 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가 결국 성경의 노아와 영화의 노아 사이의 근본적인 간극을 만들어냈다.

창작의 자유와 원전에 대한 책임

물론 모든 문학적·영화적 각색은 창작의 자유를 가진다. 성경을 원전으로 삼는 영화라 할지라도 감독의 해석과 예술적 선택이 개입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창작의 자유에는 원전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 따른다. 특히 수십억 명의 신앙인들이 경전으로 삼는 텍스트를 다룰 때, 본문이 명시적으로 기록한 사실을 뒤집거나 에녹서 전통마저 왜곡하여 자의적으로 재조합하는 것은 창작의 자유를 넘어 원전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영화 '노아'는 그 야심과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감시자를 통한 방주 건조, 함의 여자 문제, 쌍둥이 여아의 살해 위기 장면 등에서 성경 본문을 반복적으로 이탈한다. 이는 개별적인 창작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 전반에 걸쳐 원전보다 극적 서사와 감독 자신의 세계관을 우선시하는 일관된 태도의 결과다.

나가며

성경의 노아 이야기가 수천 년을 넘어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이유는, 그 속에 담긴 신앙과 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보편적 주제 때문이다. 초자연적 조력자 없이 긴 세월 방주를 지은 노아의 순종, 이미 아내를 얻어 방주에 함께 오른 세 아들의 모습, 이 단순하고 명확한 성경의 기록 속에 이미 충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영화 '노아'는 그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덜어내고 왜곡함으로써 원전이 가진 본래의 힘을 스스로 약화시켰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넷플릭스에서 이 영화를 보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던 그 밤의 의문은,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성경을 소재로 한 영화는 성경을 알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앎이 있을 때, 영화가 무엇을 충실히 담아냈는지, 또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비로소 제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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