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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Story

순정의 가곡왕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V

by 정마에Zeongmae 2018.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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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쿠펠비저!


   일찍부터 편지를 쓰려고 생각하면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마침 그곳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서, 그 기회가 생겼으니 흉금을 털어놓으려 해. 너는 친절하고 너그러우니까 비록 다른 사람 같으면 내게 화를 낼 일이라도 모두 용서해 주리라 믿어. 그러니까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불행하고 비참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건강으로 보아 완전히 나을 가망은 없고, 비관한 나머지 오히려 악화되기만 하는 인간이 여기 있다는 것을 상상해 봐. 빛나는 희망은 모두 부서지고, 모든 사랑과 행복도 고뇌로 변해서 아름당무에 대한 열광(적어도 자극)도 사라져 가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상상해 봐.

   이것이 비참하고 불행한 인간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묻고 싶어.

   '나의 안식은 사라지고, 내 가슴은 무겁도다. 행복을 찾지도 못했고 찾을 길도 없노라'고 지금의 나의 매일을 노래부르고 싶어. 밤이면 밤마다 잠자리에 들 때는 다시 깨지 말기를 바랄 뿐이야. 아침에 깨면 어제의 괴로움을 다시 되풀이하지. 이렇게 기쁨도 사랑도 없이 매일을 보내고 있어. 슬픔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만이 사람들을 가장 즐겁게 할 수 있지. 슬픔은 정신을 강하게 하는 거니까. 슈빈트가 때때로 찾아 주지 않는다면, 그가 즐거웠던 지난 날을 일깨워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모임은, 아마 너도 알겠지만, 맥주와 소시지를 죽도록 마시고 먹고 해서 되살아 나기까지에는 이틀이나 걸리는 형편이지만, 네가 떠난 뒤로 나는 거의 어울리지 않아....... 빈에 있어서의 큰 뉴스는 베토벤이 연주회를 열고 그의 신작 교향곡과 미사 가운데 3장과 신작 서곡 한 편을 발표하는 것이야. 되도록이면 나도 내년에는 그런 연주회를 열고 싶어. 지면도 다 했으니까 이만하고 자애를 빌며.......


                                                                                        진실의 벗 슈베르트



   위의 글은 그림 수업을 위해서 로마에 머물고 있는 화가 쿠펠비저에게 슈베르트가 1824년 3월 31일에 보낸 편지의 전문이다. 

   이 편지는 그러니까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4년 전의 것인데, 이 편지에 고백된 사연과 기분이야말로 슈베르트의 만년을 일관해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슈베르트가 이 편지의 서두에서 고백한 불치의 병이라는 것은 미래 영겁에 인류의 사랑을 받을 그의 명예를 위해서 밝히지 않으려 하지만, 그는 그 전 해에 어리가 모두 빠졌다가 다시 돋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슈베르트는 깊은 마음의 충격을 받았고 인생에 대해서 우울한 눈길을 던지기 시작했다.

   "밤이면 밤마다 잠자리에 들 때면 다시 깨지 말기를 바랄 뿐"이라는 그의 고백은 얼마나 심각한 심경에서 쓰여진 것인지......

   더구나 과거 절친하던 모임의 친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린 것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고독감을 주었다.

   슈파운은 관리가 되어 린츠로 가고, 쇼버는 배우 수업을 받으려고 브레스라우로 가버렸다. 그리고 쿠펠비저는 로마에 있었다. 편지의 사연대로 슈빈트만이 가까이 있었다.

   결국 20대 청춘의 방종한 생활은 끝이 나게 마련이다. 사랑을 얻거나 직업을 얻거나 결국은 흩어지게 마련인 것이다. 뒤에 남은 사람만이 고독에 몸을 떨어야 하고 야박한 인생에 뒤져야 하는 것이다.


쿠펠비저


   슈베르트는 그 해 여름, 6년 만에 다시 에스테르하지 백작가의 음악 교사가 되어 제레스의 별장으로 갔다. 6년 전에 어린 소녀였던 카롤리네 공주는 열여덟 살의 미인이 되어있었다.

   그 전 해에 연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 처녀』를 발표해서 평판이 높은 젊은 작곡가와 성숙한 처녀가 된 카롤리네가 우애의 선을 넘었으리라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결국은 슈베르트에게 있어서 카롤리네는 아득한 하늘의 별에 지나지 않았다. 신분이 그랬고, 병이 든 육체가 그랬고, 집 한칸 없는 가난이 그랬다.

   30이 가까운 슈베르트가 카롤리네를 깊이 사랑했었다면 그만큼 그는 자기가 놓여 있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어 깊은 고뇌에 빠졌을 것이다.


 음악가들의 묘지가 시작되는 부분에 있는 모차르트 기념비를 중심으로 왼쪽에 있는 베토벤의 묘와 오른쪽에 있는 슈베르트의 묘.


   1827년에 발표한 가곡집 『겨울 나그네』에 깃든 우수는 이렇게 깊은 인생의 쓴 맛을 거쳐서 승화된 심오한 노래들이다. 1년 후의 죽음을 예상한 듯한, 암담한 환각의 애가들이다.

   1828년 9월, 몸이 쇠약해지고 갈 곳이 없게 된 슈베르트를 교외에 사는 둘째 형 페르디난드는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왔다. 교외라고는 하나 침침하고 습기가 많은 둘째 형의 집은 병든 슈베르트에게 좋은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신세였다. 형은 동생을 위해서 마음을 썼으나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렇게 지내던 그는 티푸스에 걸렸다. 11월 18일에는 '왜 나를 지하실에 혼자 두냐'는 둥, 아냐, 여기엔 베토벤이 누워있지 않아'는 둥 병세가 악화되어 헛소리를 했다. 그리고 이튿날 오후 3시, 한 많은 31년의 짦은 인생을 마쳤다.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헌 양복 세벌과 낡은 침구와 악보의 원고 뿐이었다. 

   슈베르트의 친구들은 열성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작곡가는 진혼곡을 쓰고, 연주가는 연주회를 열고, 건축가는 무덤을 설계하고, 조각가는 흉상을 만들고, 시인은 묘비명을 썼다. 살아서 그렇게도 불우했던 슈베르트는 생전에 그렇게도 숭배했던 베토벤의 옆 자리에, 누구 못지 않은 영원의 안식처를 친구들의 손으로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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