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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Story/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지휘의 역사 1

by 정마에Zeongmae 2023.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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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자가 직접 지휘를 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선 뒤부터였다. 그 이전의 지휘 활동은 분명한 방법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고, 합창이나 합주의 통일을 꾀하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임시로 택했을 뿐이었다. 그리스 비극에서는 합창을 발장단으로 지휘하거나 중세에는 교회 합창단의 수석 가수가 손뼉 박자를 치기도 했다. 그 손뼉 박자 대신에 손동작으로 속도나 박자를 지시하게 되고 문예부흥기의 다성음악 전성기에는 악보를 말아 쥐고 박자를 쳤고 또 마루를 두들겨 박자를 맞추었다.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기악의 발달과 함께 합주가 많아지면서 그것을 통일하기 위해 하프시코드의 통주저음이 깔렸는데 교회에서의 오르간과 같은 작용으로 지휘의 역할을 했다. 또 통주저음 대신 기다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들겨 지휘를 한 일도 있었다.

    18세기 후반부터 관현악의 조직이 정비되자 콘서트 마스터가 지휘권을 쥐게 되면서 하프시코드는 지휘권을 바이올린에게 넘겨주었다. 콘서트 마스터가 바이올린을 켜며 지휘하고 중요한 부분에 이르면 활을 휘둘러 지시를 했다. 또 피아노 협주곡의 경우에는 모짜르트처럼 본인이 직접 독주하면서 지휘했다.

요한 프리드리히 라이하르트(Johann Friedrich Reichardt, 1752~1814)


    18세기 후반 독일의 오페라 작곡가인 동시에 프리드리히 대제의 궁정악장으로서 지휘를 맡은 요한 프리드리히 라이하르트(Johann Friedrich Reichardt, 1752~1814)는 바이올린의 활로 지휘했다고 전한다. 이 무렵의 지휘는 ’인간 메트로놈‘에 지나지 않았으며 템포를 알려주고 리듬을 지시하면 되었다.

    오늘날처럼 지휘봉을 쓴 것은 18세기 말, 19세기 초였다.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겸 작곡가인 이그나쯔 모젤 (Ignaz Franz von Mosel, 1772~1844)이 1813년경 빈의 음악가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 연주에서 지휘봉을 처음 사용했다는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다.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


    독일에서는 같은 무렵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가 지휘봉을 썼고 영국에서도 바이올리니스트이면서 작곡가였던 슈포어(Ludwig Spohr,  1784~1859)가 1820년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봉으로 지휘했다. 처음에는 악단원도 청중도 이 미친 듯이 흔들어대는 지휘법에 불만이었으나 속도가 정확해짐과 동시에 악기의 균형이 잘 잡혀 이윽고 만족하게 되었다.

멘델스존(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


    이러한 시험적 단계 위에 서서 하나의 지휘법을 만들어낸 사람이 멘델스존(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이다. 1835년부터 그가 지휘한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 연주회에서였다. 멘델스존의 지휘는 단순히 속도와 악기의 나갈 차례를 지시하거나 잘못을 바로잡을 뿐만 아니라 악곡의 정신을 탐구하고 지휘자의 생각을 추가하여 악곡을 재창 조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멘델스존은 작곡가이지 직업적인 지휘자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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