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니(Carlo Maria Giulini, 1914~2005)
음악에 대한 진지하고 오롯한 자세가 낳은 강한 설득력
줄리니는 1914년 남부 이탈리아의 바를레타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로마의 성 세실리아 음악원에 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우고 같은 지역의 아우구스티노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 주자로 활동했다. 그 후 지휘를 공부하기 위해 성 세실리아 음악원에 재입학해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된다.
지휘자로 데뷔한 것은 1944년 성 세실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였다. 1946년에서 1956년에 걸쳐 로마의 이탈리아 방송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역임했고, 그 사이 1952년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에게 인정을 받아 밀라노 스칼라 가극장에서도 지휘를 했으며 1953년부터는 수석 지휘자로서 오페라에서도 활약한다. 그리고 1956년에는 두 자리를 모두 떠나 이탈리아 이외의 나라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게 된다.
60년대 초에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많은 곡을 녹음하기도 했으며, 1968년에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를 맡는 동시에 빈 필, 베를린 필에도 때때로 초대되기에 이르렀다. 1973~ 1976년에는 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 1978~1980 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필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고 그 후엔 자유롭게 연주활동을 했다.
이처럼 줄리니의 경력을 보면 밀라노 스칼라 가극장에서 수석으로 재직한 것 이외는 오로지 콘서트 지휘자로만 활동한 것이 눈에 띈다.
이미 말했듯이 줄리니는 60년대 초반부터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공연을 했고 1968년부터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를 맡아 수많은 녹음을 남겼는데, 이 두 오케스트라의 특징과 줄리니 지휘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공연의 성공에 수긍할 수 있다.
60년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레코드는 그다지 많이 접할 수는 없지만 베르디의 「레퀴엠」, 「성가 4편 」, 브람스의 교향곡 제4번, 드뷔시의 「바다」, 「야상곡」 등 줄리니다운 특징이 살아 있는 탁월한 연주를 들을 수가 있다. 특히 베르디에서는 소프라노 가수 슈바르츠코프를 비롯한 뛰어난 가수진도 한몫을 하는데, 단순히 이탈리아적인 칸타빌레에만 의지하지 않고 내면을 성찰하는 듯한 표현으로 훌륭하게 연주하여 오늘날까지도 명연주로 기록될 만큼의 가치를 지닌 레코드이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음반을 녹음한 것은 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였는데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음반 이상의 정성을 들였으며 악보를 명확하게 연주해 내고 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9번, 말러의 교향곡 제9번 등 모두가 조화가 잘 이루어진 뛰어난 연주다. 이들 음반은 좀 건조하게 들리는 부분이 있어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이 시기 줄리니 최고의 모습을 보여 주는 음반은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몇 안 되는 음반인데,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2번 등은 오케스트라 자체의 기술적인 면에서는 시카고 심포니에 뒤떨어지는 부분이 있지만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는 원숙미 넘치는 표현으로 강한 호소력을 드러낸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말러의 교향곡 제1번 등도 1974년 빈 필과 연주했던 것이 말러의 젊은 열정을 더욱 잘 표현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줄리니는 1978년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는데 그 무렵부터 템포가 느려지고 묵직한 표현이 눈에 띄게 된다. 예를 들면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슈만의 교향곡 제3번 등에서는 현을 주체로 한 새김이 깊고 중후한 표현을 들을 수가 있다. 한 가지 애석한 것은 오케스트라의 기술 면에서 섬세한 뉘앙스가 부족해 전체가 좀 단조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면은 로스엔젤레스 필을 사임하고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빈 필이나 베를린 필 같은 초일류급 오케스트라와 공연하여 수준 높은 음악을 들려줌으로 해소하고 있다.
음반으로는 빈 필과 녹음한 브루크너의 마지막 세 교향곡(제7번, 제8번, 제9번), 브람스의 교향곡 제3번, 제4번, 베를린 필과 녹음한 베르디의 「레퀴엠」, 말러의 「대지의 노래」, 프랑크의 교향곡 D단조,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모차르트의 「레퀴엠」 등이 있다.
또한 줄리니는 오페라 지휘자로서도 매우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콘서트 지휘자로서만 철저한 게 아니라 이따금씩 오페라를 지휘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빈 필과 공연한 베르디의 「리골레토」 같은 명반을 들으면 그가 얼마나 탁월한 능력을 지닌 오페라 지휘자인가를 알 수 있다.
두 오케스트라로 듣는 줄리니
줄리니는 한 오케스트라의 전임으로 장기간 동안 활동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수석 지휘를 맡았던 오케스트라를 포함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로스앤젤레스 필, 빈 필, 베를린 필 등 세계 정상급 악단에 계속해서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보통 객원 지휘를 맡는 지휘자는 많은 연습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오케스트라 쪽 특성에 의존하게 되어 자신의 개성을 발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줄리니가 이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되면 각각의 오케스트라의 개성을 살리면서 작품에 적당한 표현을 이끌어 내고 거기에 자신의 음악성을 확실하게 새겨 넣는다. 바로 이러한 점에 줄리니의 위대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공연한 브람스 교향곡 제4번에서는 브람스에 어울리는 베이스를 이용한 안정감 있는 음향을 만들면서 전체적으로는 결코 두텁지 않은 오케스트라 음향의 특성을 그대로 살려 엄격한 표현을 이끌어 내고 있다. 특히 악센트, 스포르잔도, 스타카토 등을 섬세하고 명확하게 구별해서 강하게 살려줌으로써 뚜렷한 표정을 부여하고 극적인 흐름을 만들어 낸다.
한편 같은 브람스의 교향곡 제4번을 빈 필과 녹음한 경우에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연주할 때처럼 강한 악센트를 주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표현이 힘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빈 필하모니의 각 연주자들이 가지고 있는 표현력을 충분히 살려 풍부한 느낌을 가진 깊이 있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특히 전체적으로 팽배해 있는 긴장감의 높이는 진정한 거장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심오한 것이다. 또한 빈 필 특유의 달콤하고 풍부한 음향을 능숙하게 조절함으로써 쓸쓸함이 느껴지는 향수 어린 음향을 이끌어 내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